어린 참나무는 자라서 참나무가 되고 강아지는 커서 개가 되면 그만이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잠재성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성장이며, 잠재성 실현이 왜곡될 때 인간은 올바르게 성장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우리 자신을 키우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내면 세계를 글로 표현함으로써 자기 발전을 이룩하고, 글로 타인과 소통함으로써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든다. 이처럼 글쓰기에는 쓰기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다만, 한순간에 폭발하고 마는 열정이 아니라 꾸준하게 실천하는 열정이 필요하다. 글쓰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평소 열심히 책을 읽고, 다양한 글쓰기 활동에 참여하며 자기가 쓴 글을 다른 사람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또 다른 사람의 평가에 쉽게 마음을 꺽지 않는다. 이를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관심사를 이어간다 <달과 6펜스>를 쓴 윌리엄 서머싯 몸은 매일 아침 9시부터 4시간동안 규칙적으로 글을 썼다. 덕분에 그는 서른 편의 희곡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할수 있었다.
글쓰기란 노력하는 과정에서 글이 완성되는 때가 찾아오는 작업이다. 자료를 수집 · 정리하고, 끝없이 고쳐 쓰는 시행착오와 분발하는 마음이 글을 완성시킨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억지로, 빨리 글을 끝내려고 덤벼들어서는 안 된다.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글의 주제와 여건이 충분히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한다.
차분하게 하나하나 글을 이루려는 노력이 무수히 쌓이면서 도저히 글이 될 것 같지 않은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다. 마치 가볍게 내리는 눈송이가 쌓여 소나무 가지를 꺾어내리 듯이, 바닷가의 물결이 끊임없이 조약돌을 쓰다듬어 둥글게 만들 듯이, 글쓰기의 열정은 글쓰는 이도 모르는 사이에 목표하는 곳에 도달하게 해준다.
글쓰기의 출발점에서 자신을 살피는 일은 작게는 한편의 글을 잘 쓰기 위해서지만, 크게는 자신을 내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쓴 나탈리 골드버그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대학 시절에 골드버그는 오로지 선생님의 마음에 들기 위한 글을 썼다. 그러나 그 글은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골드버그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접고 레스토랑에서 일을 해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서점에서 음식과 관련한 시를 보고는 자신만의 감정과 생각을 담은 글이 참다운 글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런 깨달음이 없었다면 골드버그는 문학에 대한 열정을 영원히 접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글쓰기를 시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출발이 자기 자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글쓰기의 출발에 앞서 나는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 나는 어떻게 글을써야 하는지 살펴야 한다.
독자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상처를 보듬고 함께 삶을 열어가는 데 보탬이 되는 글인지, 아니면 단지 그 마음을 이용해 글쓴이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휘두르는 글인지가 중요하다. 독자의 마음을 살펴 글을 쓰는 일은 독자의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읽어내는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미리 대화 내용을 준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그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대화는 현장에 충실한 대화다. 마음을 열고 상대방과 앉아 즉석에서 나누는 대화를 존재 양식의 대화로 생각한다. 수업을 듣는 학생의 자세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선생님의 강의를 충실히 받아 적는 학생은 단지 지식을 소유하고자 하는 소유 양식의 학생일 뿐이라고 본다. 그보다는 강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을 훨씬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그보다는 글 읽는 사람의 사유를 활성화 하는 독서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홍길주는 책을 만 권이나 읽고 한 글자도 남김없이 외우는 사람이라도 식견이 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고 한다. 이와 달리 깨달음이 있어서 손가는 대로 뒤적여도 핵심에 가닿는 독서야말로 진짜라고 한다.
이처럼 홍길주는 독서에서 핵심과 깨달음을 매우 중히 여겼다. 그는 책 전체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일부이므로 소소한 것들은 버려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므로 어떤 책을 읽든, 설사 그것이 불후의 고전으로 불린다 하더라도, 그 책이 자기의 사고를 활성화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읽기를 멈추어야 한다. 반대로 자신의 사고를 활성화하는 책이라면 그림책이나 동화라도 관계없다.
책을 마치 우상처럼 떠받들어서는 안된다. 책의 내용은 우리에게 소화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고이 간직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읽는 이의 정신이 자유로워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독서를 하며 생각에 잠기고, 자신의 생각을 돌아보며, 새롭게 어떤 생각을 펼쳐나가기도 한다.
독서를 하면서 우리는 많은 지식을 얻고 간접 경험을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독서는 무엇보다 자유로워야 한다. 글쓴이와 독자의 관계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 같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안목을 넓히기 위해서는 책 읽는 이의 정신이 무엇보다 자유로워야 한다. 책의 내용을 일일이 기억하려는 독서만큼이나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독서는 우리의 사고를 활성화하기보다 도리어 속박한다.
책에 대한욕심을 버리자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저절로 안목이 트이지는 않는다. 많은 지식이 그냥 쌓여 있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옛말에 책을 많이 읽어 그 책을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며 끌어야하고, 집에 쌓아놓으면 대들보까지 찬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만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라 해도 자기 나름대로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을 볼 줄 아는 안목에 눈 뜨지 못한 사람이라면, 단 한권의 책을 읽지 못했어도 세상 볼 줄 아는 사람만 못하다. 그러므로 책을 읽을 때에는 자기 나름대로 이 세상과 사물의 이치를 볼 줄 아는 눈을 키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책과 독서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덕무가 독서의 효용으로 가장 중요하게 꼽은 것은 정신의 즐거움이다. 그렇지만 정신의 즐거움이야말로 단순히 지식을 습득해서 누릴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정신의 즐거움은 독서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서 온다.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자신을 이덕무는 책을 읽으면서 만나는 기쁨을 누린 것이다. 결국 독서로 새로운 안목을 얻었다면, 그것은 새로운 자신이 되었음을 뜻한다. 독서는 우리에게 현장의 생생함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독서를 하면서 활성화되는 우리의 사고는 자기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한다.
영상 이미지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우리의 사고를 마비시킬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으며, 즉석에서 비평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데는 비교적 긴 시간이 필요하므로 주제에 오랫동안 머물 수 있다. 정보가 폭주하는 상황에서 한 가지 주제에 관심을 지속할수 있는 것이다. 안목은 사물의 본질에 도달하지 않고는 얻기 어려운 능력이다. 어떤 지식을 전수 받는다고 해서 쉽게 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을 오래 잡아두고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독서의 불편함이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아무리 많은 경험을 하고, 아무리 많은 관찰 자료를 얻고, 수 만권의 책을 읽었다 해도 사색하지 않는 사람은 글을 제대로 쓸 수 없다. 사색하지 않는 사람이 쓴 글은 글이라기보다 수많은 사실이나 지식, 경험을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런 글은 요령없는 초보 교사가 너무 많은 지식으로 학생을 힘들게 하듯 읽는 이를 지치게 한다. 사색을 통해 얻게 되는 안목이란 자기 나름대로 사물 세계에 질서를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며, 글의 주제를 확정하고 줄거리를 만드는 근본이다.
사색은 자기를 긍정하는 힘에서 나온다. 사색하는 힘은 자존감에서 생긴다. 사색은 자기 눈으로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며 그 의문에 답하는 행위다. 자기 나름대로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행위이기에 사색은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세울 때 가능하다.
그에 깊이 사로잡혀 그것을 탐색하는 데 생각을 집중한다. 이를 위해 일상의 공간을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숲속에 오두막을 짓고 혼자 지낸다든지, 자기를 아는 이가 없는 도시에서 흘로 지낸다든지 하면서 사색에 잠긴다. 또는 여기저기를 떠돌기도 한다. 하지만 사색이 반드시 일상의 공간을 떠나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색이 방해 받는다고 생각할 때 일상을 떠날 뿐이다. 그리고 사색이 언제 끝날지, 어떤 결과를 내보일지 우리는 예측하지 못한다. 단지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고, 그 생각에 우리가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만을 알 뿐이다.
사색은 스스로가 해체되는 경험이다. 그러나 이는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진행되는 과정이기에 격렬한 감정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또한 사색은 본질적으로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사고 활동이다. 대상에 이끌리고 의문을 품으며 대상을 살피지만 어디까지나 주체성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사물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제대로 된 사고 활동을 하기전에는 타오르는 무엇이 있었을 뿐이다.
모호한 상태에 머물고 만다. 하나의 말이 생겨난 뒤에야 비로소 시작한다.
말이나 대화에서 어휘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크다. 인간은 말을 매개로 세상과 더불어 산다. 어휘는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그러나 어휘가 단순히 의사소통만을 위한 도구는 아니다.
어휘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실상을 드러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물을 지칭하는 말이 없을 때 우리 사고는 애매모호한 상태에 머물고 만다.
어휘는 이처럼 사물을 단순하게 만들며 사물의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사실 어휘는 정확하게 대상을 지칭하거나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사물과 어휘 사이에 거리가 점점 벌어져서 불일치가 깊어질 수 있다. 이것은 어휘가부족해 생겨나는 문제와는 다른 차원에서, 말의 표현력을 떨어뜨리고 소통에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풍부한 어휘력 못지않게 그쓰임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하다.
문장은 사고의 표현이다. 문장은 우리의 생각을 문자를 빌려 표현한 것이다. 누군가 그리울 때 '나는 너를 보고 싶다'처럼 표현하는 것이나, 아름다운 꽃을 보고 '꽃이 아름답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문장이다. 그러므로 문장은 기본적으로는 사고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문장을 쓰거나 말하는 이유는 내 생각을 다른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의사소통에 필요한 문장으로서의 조건 또한 갖추어야 한나. 문장이 만들어지는 생성의 차원과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표현의 차원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 문장 쓰기의 과제다.
문장 쓰기는 각 개인의 사고 특성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함부로 자기 문장을 다른 사람의 기준에 맞춰 바꾸려 하거나 다른 사람의 문장을 흉내 내서는 안 된다. 짤막한 문장 쓰기가 유행하고 멋있어 보인다고 해서 무작정 쫓아서는 안 된다. 어떤 글은 길게 문장을 구사할 수밖에 없을 때가있고, 어떤 글은 짧게 빠른 속도로 문장을 구사해야 의미가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 문장의 길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사고의 특성에 맞게 자연스런 문장을 쓰는 일이다. 대체로 쓰려는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면 자연스런 문장이 나온다.
문장을 잘 쓰기 위해서는 쓰려는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는 일이 우선이다. 또한 문장을 자연스럽게 쓰기 위해서는 우리말 문장 구조에 익숙해야 한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말 문장 구조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글을 쓴다. 따라서 우리말 문장 구조에 어울리지 않는 글을 쓸 때 자연스럽지 못한 글이 나온다. 이는 단순히 외국어식 표현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말 문장 구조의 자연스런 특성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간설한 표현만을 추구하려는 데서 비롯하는 잘못이다.
치마를 찢고 발광을 했다. 그렇지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입술을 깨물고 이를 악물고 태연한 척한다. 그래서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복합적인 심정을 전달하려다보니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반어적인 표현이 나왔다.
수사적인 표현은 그렇게 써야 할 마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지 표현만을 위해 멋을 부린다면 도리어 표현의 효과를 살리지 못한다. "한 조각의 말로도 핵심을 찌른다면 마치 적군이 탈진하기를 기다렸다가 그저 공격 신호만 보이고도 요새를 함락시키는 것과 같다"라는 연암의 말은 그런 점에서 핵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글은 문장에 문장이 꼬리를 물면서 끝없이 전개된다. 우리의 사고가 흘러가는 대로 문장도 흘러간다. 단락은 끊이지 않는 글의 흐름에 박자를 조절하는 행위다. 다시 말해 글의 흐름을 끊어내고 의미 단위들이 이루는 질서를 만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단락을 이해하려면 글이 어떤 식으로 의미를 전달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글은 문장 단위가 아니고 단락 단위로 의미를 펼쳐 보인다.
단락은 글 쓰는 이가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장치다. 또한 글을 쓰다보면 주의가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주의가 흐트러지면 글이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지나치게 길어진다. 단락은 이런 문제를 방지해서 독자의 부담을 덜고, 글쓴이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기 위한 글쓰기 전략이다.
그런 점에서 단락 쓰기는 상당히 중요하다. 단락쓰기를 할 줄 안다는 것은 글쓰기 과정에서 자신의 사고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능력이 있음을 뜻한다.
가주제 설정→자료 수집→자료 정리→ 주제 확립
재구성 (편집)→개요 작성→초고 쓰기→다시 쓰기→마무리(퇴고)
의 짧은 글을 쓰든 책을 한 권 만들든 이 같은과정을 거친다. 우리가 글쓰기에서 준비 단계를 거쳐야 하는 까닭은 주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준비 단계를 거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하고, 보다 깊게 글을 다듬을 수 있으며, 점차 자신의 계획이 구체화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그리고 글이 차츰 형태를 갖추면서 무엇이 부족하고 불필요한지를 알게 된다. 다시 말해 글쓰기 준비 단계는 글쓰기에 구체성을 부여하고, 글의 의미 구조를 명확하게 세워 주제를 실현하게 해준다. 논리적인 글쓰기를 모델로 해서 설명해보자.
자료 수집
그러므로 글쓰기에서 필요한 질문지를 만들고 이에 답변하는 방식으로 자료 수집은 매우 중요하다. 다음 단계에서 주제를 확립하는데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글쓰기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인간은 구체적인 자료가 있을 때 참신한 생각이나 표가 주제를 설정한 다음에는 자료를 수집한다.
떠오르는 대로 질문을 적고 그 다음에 정리하는 게 좋다(브레인스토밍). 인간의 두뇌는 문제 해결을 위해 움직이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전혀 엉뚱한 것처럼 보이는 질문도 차분하게 따라가다보면 자신이 원하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글쓰기를 하는 사람 가운데 글쓰기 준비 단계를 건너뛰고
곧바로 글쓰기에 뛰어드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어떤 글쓰기든 준비 단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사고는 그다지 논리적이거나 체계적이지 않다.
글감의 정리. 즉 자료 정리는 주제의 확립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우리는 자료를 정리하면서 생각이 분명해지고, 글쓰기 대상에 대해 의견이 명확해진다. 이것이 바로 주제이다. 주제는 글감을 징리하면서 내리는 최종적인 결론이다. 즉, 글 쓰는 이가 자료와 씨름하면서 만들어내는 의식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같은자료를 가지고도 사람마다 다른 주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료를 정리해 주제를 결정하는 일은 글의 구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글의 구성은 모두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글의 조직을 가리킨다.
구성 방식이 먼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구성이 갖추어진다.
구성은 쉽게 말하면 주제를 뒷받침하는 논리 구조이다. 만일 글의 구성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지금 분명하게 주제를 이해하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솔직히 캐물어야 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소개하는 구성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 안 된다. 그것은 에디까지나 참조사항이다. 개요의 작성은 그렇게 만들어진 기본적인 구성에 변화를 주며 보다 효과적인 형식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형식을 갖추어야 하는 글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그 외에는 자기 글에 맞는 가장 자연스런 내용의 전개 형식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글쓰기는 뭔가? 생각을 쓰는 일. 글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가? 초등학교?
좋아서 쓴다. 어떤 때는 글쓰기 싫다. 낙서처럼 쓰고 싶다. 일기 쓰듯, 글의 종류가 많다. 하늘의 별만큼 많다. 도대체 글쓰기가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개념인가?
많이 읽는 것이 해결책이다. 아니다. 책 많이 읽는다고 다 글을 잘 쓰지 않는다.
글쓰기란 무엇인가? 언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나?
오랜 세월 많은 특별한 재능이 필요할까?
글쓰기에 관한 한 이름 있는 작가가 있고, 오랜 세월 많은
글쓰기는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종
의 기예 같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옳지 않다. 글쓰기가 어
떻게 가능하고, 불후의 명작이나 훌륭한 작가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제대로 살피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다.
글쓰기는 말하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보편적인 능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늘 말을 하면서 지
내기에 말하기를 글쓰기처럼 별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다. 물론 격식을 갖추어서 하는 말은 따로 연습을 해야 하
지만, 글쓰기처럼 특별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글쓰기도 말하기처럼 일상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연습하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수많은 글과 책이 존재하는 것이다.
쓰기 단계에서는 글 쓰는 환경도 중요한 전략적 요소로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효과적인가를 연구해야 한다. 대부분 우리는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어느 때 글이 잘 써지고 어떤 방식으로 작업해야 효과적인지를 파악한다. 글쓰기를 많이 하지 않은 초심자는 다음과 같은 점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한 번 집중해서 글을 쓰고 나면 어느 정도의 휴식기를 가져야 하는지, 한밤중에 쓰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카페 같은 노출된 환경이 도움이 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또 참고 자료를 바로 곁에놓고 확인하며 써야 잘 써지는 편인지. 나중에 확인해도 되는지 등도 생각할수 있다.
글은 어디까지나 독자가 읽을 때 의미가 있다. 독자가 차분하게 독서에 집중할 수 있게 글 쓰는 사람은 글을 잘 매만져야 한다. 여러 번 고쳐 쓰는 단계를 거친 글이라도 구성이 엉성하거나 편집 상태가 좋지 않아 독자가 잘 읽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수고롭더라도 재구성이나 편집에 소울해서는 안 된다.
마무리의 한계
어휘를부적절하게 쓰거나 문장을 잘못 쓰면 의미 전달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차분하게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어휘와 문장을 살펴야 한다. 글쓰기는 준비 단계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원고의 질과 품격이 달라진다. 마무리로 가까이 갈수록 원고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든다. 대강 쓰고 나중에 고치면 된다는 식의 속면한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 준비를 알뜰하게 할수록 생동감 있고 구체적인 글이 나온다. 글은 그냥 머리에서 쏟아지지 않고, 준비한 자료를 토대로 우리 머리에서 활성화되어 나온다.
글쓴이가 자기의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쓴 글
이다. 글쓴이는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겪는 어려움을 어떻게 풀었는지를 솔직하게 말한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복도로 나가고, 복도에서 혼잣말을 하며 사태를 이성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일상에서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쓰는 글은 이렇게 솔직하면 그만이지, 미리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글에서처럼 어떤 형식을 갖출 필요도 없고, 어휘의 선택이나 문장의 길이, 단락 나누기 등도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은 고전으로 널리 읽힌다.
<월든>은 소로우가 미국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 있는 월든 호숫가에서 지낸 2년 남짓의 생활상을 소개하고 있다. 자기 손으로 집 짓고, 농사짓고, 독서를 하며 진정한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실천한 결과물이다. 이 책은 문명에 지친 이들에게 영감과 용기, 그리고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월든호숫가에 있는 소로우의 집을 방문한다.
인용한 글은 소로우가 집을 짓고 나서 계산한 비용을 주로 이야기한다. 집을 지으면서 한 일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쓰고 있다. 필요하면 표도 그려가며 자유롭게 자기의 생각을 쓴다. 이처럼 일상을 소재로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글쓰기는 누구나 부담 없이 할 수 있다.
그런데 글을 많이 안써본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힘들어 한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 그저 멍하니 앉아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쓰려는 주제에 관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할 때에는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익숙하게 알고 있는 주제에 대해 쓸 때에도 이런 일이 생긴다면 문제다. 이러한 문제는 대체로 자신의 생각을 차분하게 풀어나가는 훈련이 부족해서 생긴다. 그런 훈련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일상에서 실천하는 글쓰기다. 우리는 잘 알고 있는 내용을 글로 쓰면서 차분하게 자기의 생각이 흘러나오는 상태를 경험하며, 글을 풀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우리는 일상에서 실천하는 글쓰기를 통해 글쓰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내면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교사인 글쓴이가 초등학생이 쓴 편지를 인용하며 쓴 글로 일상적 삶을 소재로 하는 글쓰기가 어떤 깊이를 지닐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글쓴이는 자기 생각이 가는 대로 편지글과 자기 글을 이어가면서 글을 쓰고 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진솔한 감정을 담아낸 글에서 삶의 깊이가느껴진다.
우리는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처음에는 서툴고 부족하지만 조금씩 글을 써나가면서 스스로 글쓰기를 익힌다. 부족한 글이라도 자꾸 쓰다보면 글쓰기가 즐거워지고 글 쓰는 힘이 자란다. 따라서 일기를 쓸 때에도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면 된다. 틀린 표현이 있으면 있는 대로, 내용이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대로 쓰면 된다.
자기 내면을 정리하고 확인하는 즐거움
글쓰기의 첫걸음은?
글쓰기의 첫걸음은 내 마음대로 쓰기다. 원고의 분량이나 내용을 걱정하지 말자. 형식이나 글의 종류를 따질 필요도 없다. 생활하면서 맺히는 생각을 써보고, 책을 읽다가 떠오른 생각을써보자. 새로 알게 된 사실도 쓰자.
어떤 사람은 글을 쓰려고 하면 아무 생각이 안 난다고 하소연한다. 그런데 생각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누구
나다 생각이 있다. 다만 지금 과제에 대한 생각이 안 떠오
를 뿐이다. 평소 관심이 없던 주제에 대해 쓰라고 하면어
떻게 글을 쓰겠는가? 그렇지만 내가 내 맘대로 쓰는데 생
각이 안 날 리 없다. 그런데도 안난다면? 글쓰기보다 마음
이 문제다. 왜 자기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어
린아이들은 정말 끈질기게 자기의 생각을 말한다. 그런 어린아이의 마음이 어디로 간 것일까?
평소에 늘 글감을 수집하자
“글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료에서 나온다.” 정희모·이재성이 쓴《글쓰기의 전략》에 나오는 말로서 자료가 글쓰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단적으로 강조한다. 글쓰기에서 글감은 매우 중요하다. 글감이 없으면 어떤 글도 제대로 쓸 수 없지만, 글감이 풍부하면 없는 글도 생겨난다. 따라서 요리사가 평소에 식재료에 관심을 기울이듯이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글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연암의 철저한 기록 정신은 그의 글쓰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는 현실과 마주 대해서 얻은 깨달음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 연암은 자연 사물을 관찰하다가 묘한 생각이 떠오르면 반드시 붓을 들어 써 두어, 잔글씨로 쓴 종잇조각이 상자에 가득 차곤 했다. 연암은 새로 깨달음을 얻으면 반드시 메모를 했다. 메모는 수많은 아이디어 중에서 쓸모 있다고 판단되는 점을 적어 두는 것이다. 연암은 사물을 관찰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면 그 깨달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수시로 메모하곤 했다.
연암은 평상시에 자연 사물을 관찰하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기록했다.
그리고 글감들이 보여 글이 되고 책이 된다. 앞서 소개
한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옥중에서 보낸 편지모음이다. 이 역시 책을 내기 위해 편지를 쓰고 모은 것이 아니다. 글쓰기를 위해 자료 모으는 것을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주변에서 마주치는 사물이 모두 글감이 될 수 있다. 나무, 풀, 꽃, 새, 고양이, 강아지·..... 자유롭게 대상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라도 모으자.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글감이 된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문자를 넘어 이미지 형태로 기록
방식이 확대되었다. 글 쓰는 사람에게는 매우 편리한 도구를 손에 넣게 된 셈이다. 사람들은 요리, 여행,식물 키우기 따위를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찍어 글과 함께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올린다.사진이나 동영상은 글감을 위한 자료 수집을 훨씬 편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진을 컴퓨터나 USB에 저장만 해둔다면 의미가 없다. 관심 분야를 정해 사진을 찍고 정리하는 작업을 할 때에라야 의미 있는 자료 수집이 된다.
일상에서 풍부한 글감을 확보하자
글감은 노력에 비례한다.
에디슨은 천재는 99퍼센트의 땀과 1퍼센트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노력과 영감의 관계를 정확하게 규
정하기는 어렵지만, 영감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깃들지는 않는다. 천재에게 필요한 1퍼센트의 영감이야말로 치열한 노력이 이끌어낸 결과물이다. 글쓰기에서 글감의 중요성은 에디슨이 말하는 노력의 중요성에 맞먹는다. 글쓰기는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 그런 경우 대개는 추상적인 착상 정도에 머물고 말기에 얼마못가끝
나버린다. 글쓰기를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자료를 수
집·정리하는 준비 단계가 필요하다.
보통 아이디어는 막연한 상황보다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생겨난다. 우주복에도 쓰이는 벨크로테이프, 일명 '찍찍이' 의 탄생 역시 구체적인 상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찍찍이'는 게오르그 데 메스트랄이 어느 날 사냥에서 돌아와
개와 자신의 옷에 붙어 있는 산우영가시를 자세히 관찰한
끝에 얻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이처럼 평소 글감을 모아놓으면 글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블행하다면 왜 불행한지, 적어도 그 이유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후련했다. 낱말 하나, 문장 한 줄 붙들고 씨름할수록 생각이 선명해지고 다른 생각으로 확장되는 즐거움이 켰다. 또한 크고 작은 일상의 사건들을 글로 푹푹 삶아내면서 삶의 일부로 감쌀 수 있었다.
어렴풋이 알아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딜 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잡고 늘어지는 일임을. 혼란스러운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지, 덮어두거나 제거하
는 일이 아님을 말이다.
-은유,《글쓰기의 최전선》, 메멘토, 2016,9쪽.
글쓰기는 무엇을 대상으로 하든 자기 내면을 풀어내는 작
업이다. 기사를 작성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이처럼 무엇인가를 풀어내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존재다. 일상에서 꾸준하게 실천하는 글쓰기는 정신의 긴장을 늦추고 다시 일상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서, 수용소에서, 밀폐된 다락방에서 글을 쓰면서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차분하게 자기 삶을 음미하자 일상에서의 글쓰기는 이처럼 의사소통이나 기록의 역할을 넘어서 글이 지닌 또 다른 힘, 즉 표현하는 힘을 발휘하게 한다.
인간은 누구나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지닌다. 하지만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삶의 힘겨움하고만 연관 있는 것은 아니다. 표현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다움을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들 역시 일상적인 글쓰기를 하면서 욕망을 충족시킨다. 블로그나 페이스북 같은 인터넷 공간에는 사진이나 동영상과 함께 이런 글이 수없이 올라온다.
그렇지만 일상적 삶에 깊이를 더하는 글은 생활에서 느끼
는 감정을 차분하게 음미하는 글이다. 이러한 사색적인 글쓰기는 무감각하기 쉬운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우리의 일상이 늘 큰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간혹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에 부딪히곤 한다. 그럴 때 우리의 내면은 심하게 요동친다. 신경이 예민해지고 우울해진다. 대개는 시간이 흐르면서 가라앉지만 어떤 것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이때 사색적인 글쓰기가 삶을 헤쳐나가는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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