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교육 자체에 있어서는 평등을 추구 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불평등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미국의 부자계급은 사립학교를 다니고 빈자계급은 공립학교를 다닌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의 교육과정이 리더의 두뇌를 가진 사람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인문고전 중심의 사립학교 교육과정이 아닌 공장의 부품 같은 두뇌를 가진 사람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립학교 교육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학생들은 초중고 합쳐서 무려 12년이나 교육을 받고도 지적이고 창의력 넘치는 인재가 되기는커녕 좀 심하게 말하면 바보가 되어 사회에 나온다. 대학에 입학해서 다시 4년을 배우고 대학원까지 졸업해도 마찬가지다. 당당히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지식인이 되기는커녕 제 앞길 하나도 헤쳐나가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하기 일쑤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왜 우리나라 학생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무능력한 사람이 되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나라의 공교육이 시키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바보를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 시스템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이 학교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배우고도 두뇌와 삶에 어떤 변화도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야 한다. 당신의 자녀가 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머리가 비상해지고 삶의 지혜가 쌓이는 게 아니라 두 눈의 총기를 잃고 지혜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는 본질적인 이유를 알아야 한다.
학교를 부정하거나 다니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교사들이나 교육부에 돌을 던지라는 의미도 아니다. 학교는 다녀야 한다. 그것도 될 수 있으면 최고의 학교를 다녀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또 교사와 교육부는 프러시아에서 유래된 나쁜 공교육 시스템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최고는 아니더라도 최선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인문고전을 집필한 위대한 천재들이 우리나라의 학교제도를 보면 뭐라고 말할까? 십중팔구 학생의 두뇌를 죽이는, 창조성을 말살하는, 노예를 만드는, 국가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하루빨리 개혁해야 할, 민족의 운명을 걸고 반드시 새롭게 고쳐야 할 그 무엇이라고 말할 것이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문고전 저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실시한 교육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가 깊은 대화를 통해 지혜와 진리를 터득하고 발견해가는 교육이다.
새로운 두뇌를 갖고 싶다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하루 또는 일주일에 몇 시간씩 카를 비테식 '다른 교육'을 실천하기 바란다. 위대한 고전을 집필한 인류의 스승들과 지속적으로 만나 깊은 정신적 대화를 하기 바란다. 그렇게 그동안 받았던 프러시아식 교육을 두뇌에서 털어내고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는 진정한 배움의 세계로 들어가기 바란다.
과거의 자신을 죽이는 처절한 자기투쟁이 뒤따르지 않는 인문고전 독서는 지식의 축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누누히 말하지만 지식은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가 있을 때 생겨난다. 다름 아닌 그 '지혜'를 갖는 것을 나는 인문고전 독서를 통한 '변화'라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뉴턴, 처칠, 에디슨같은 위인들과 일반인을 어떻게 동류로 묶을 수 있겠느냐고. 그런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부모인 가정,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가르치는 학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일하는 조직,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정부를 한번 상상해보라. 그런 가정, 학교, 조직, 정부에 희망이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제대로' 하다보면 언젠가는 우리나라에도 뉴턴, 처칠, 에디슨 같은, 아니 그들을 뛰어넘는 위대한 천재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다.
나는 이상하게도 문제아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좋았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그래서 아이들과 열심히 놀았다. 1~2교시는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놀고, 3~4교시는 근처 공원에서 즐겁게 놀고, 학교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5~6교시는 최신 만화영화를 본 날도 있었을 정도다. 게다가 숙제는 보통 '3잘', 즉 잘 놀고, 잘 먹고, 잘 자기였다.
그렇게 몇 주를 놀고 나니 아이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노는 것도 좋지만 공부도 가끔씩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놀랍게도 문제아들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이 임원진을 통해 전달될 정도였다. 나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와 함께하는 공부는 너희들이 원해서 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하고 소위 '수업'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인문고전 독서교육의 목적을 대학 입학에 두지 마라. 그것은 논술학원에서나 할 일이다. 독서의 목적을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두기 바란다. 그것은 아이의 두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경지다. 평범한 아이를 세종,이순신,정약용,박지원,허준, 김구, 레오나르도 다빈치, 처칠, 에디슨, 아인슈타인 같은 인물로 키워내는 경지다.
그런데 이 변화는 내가 제시한 독서교육의 틀을 열심히 잘 따른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육자의 열정과 사랑을 통해서 얻어진다. 교육자 자신이 얼마만큼 치열하게 책을 읽었는가, 교육자가 아이에게 인문고전 읽는 기쁨을 전달해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교육자가 아이를 얼마만큼 사랑으로 대했는가에 달려 있다. 즉 최고의 인문고전 독서교육 노하우는 당신의 두뇌와 심장 속에 있다.
디스 못지않은 천재가 되었지만 어떤 부작용도 겪지 않았다. 그는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받으면서 깊은 행복감을 느꼈다. 또 그는 평생 가족 및 주변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냈고, 어디를 가는지 환영을 받았고, 누구를 만나든 금세 친구가 되었다. 카를 비테 주니어의 교육을 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실컷 놀면서 교육받았다.
2. 사랑과 격려가 바탕이 된 교육을 받았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위기에서 교육받았다.
카를 비테는 자녀에게 “책을 읽어라”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엄밀하게 선정한 인문고전이 가득 꽂힌 책장을 선물했다. 이로 인해 아이는 자연스럽게 책은 사랑의 선물이며 책을 읽는 행위는 멋진 선물꾸러미를 푸는 것처럼 신나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독서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자 아이는 저절로 책벌레가 되었다. 하지만 비테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이가 하루에 두 시간 이상 독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상 공부하면 놀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덕분에 카를 비테 주니어는 어린 시절 내내 친구들과 원 없이 놀면서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카를 비테는 아들을 언제나 사랑과 격려로 대했다. 그가 아들에게 했던 말은 늘 “카를, 넌 최고란다. 아빠는 네가 할 수 있다고.
역시 역사가 증명했다. 감히 말하고 싶다. 불행한 천재를 만드는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하지 않는 게옳다고.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유아든 초등학생이든 중고생이든 대학생이든 성인이든 누구나 행복해질 권리가 있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때문에 인간의 행복을 침해하는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없어야 한다. 인문고전 독서교육의 진정한 목표는 자주적이고,행복하고, 능동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역사는 또 다른 사실을 증명했다. 행복하고 자유롭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실시되는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행복한 천재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아이에게 행복하고 즐거운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시키기를 빈다.
물론 철학 그 자체에만 매진하는 것은 경제와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철학으로 단련된 두뇌가 경제에 뛰어드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철학자의 두뇌를 가진 사람은 순식간에 경제를 지배해버린다. 이유는 경제활동이 곧 두뇌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 최고의 두뇌들이 모인 월 스트리트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월 스트리트의 꼭대기에는 철학고전에 정통한 사람들이 있다.
철학고전은 사람의 두뇌를 차원이 다르게 바꾸어버린다. 사고의 수준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다. 철학고전 독서로 다져진 두뇌는 시장의 본질을 본다. 평범 책만 읽은 사람은 죽었다 깨나도 볼 수 없는 그 무엇을 본다.
서점에는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 피터 린치, 짐 로저스 등등 자본주의 세계의 최고 승자들의 투자 비법을 담은 책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의 책을 죽어라고 읽고 그들의 비법을 열심히 따라 한 사람 중에 놀라운 이익을 실현한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치열한 인문고전 독서로 두뇌의 수준을 한차원 높인 뒤에 터득한 투자의 비결을 담은 그들의 글을, 인문고전을 전혀 읽지 않은 두뇌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투자에 적용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오토바이 운전면허도 없는 사람이 세계 최고의 오토바이 곡예사가 쓴 책을 읽고 그대로 따라 하는 것과 같다.
그들의 무시무시한 자본 생성 능력을 낳은 근원적인 요소를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채 그들의 기법만 따라 하는 것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을 걷는 행위일 수 있다.
서구의 금융가들과 싸워 이기려면 아니 최소한 그들의 발톱으로부터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먼저 두뇌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금융전쟁은 곧 두뇌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문고전을 열심히 읽기만 하면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아니다. 지혜는 책 속에 있지 않다. 지혜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다.
세상에는 소위 인문고전 마니아라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어떤 교수들은 평생 인문고전만 파고든다. 하지만 그들의 독서는 세상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들은 인문고전을 '공부'하기 때문이다. 인문고전을 통해 내면의 지혜를 일깨우는 대신 말이다.
그는 고전에서 직접 발췌한 글귀들을 한문으로 써서 액자에 담아두고 그것을 늘 되새기면서 영감을 받았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렇게 그는 고전의 지혜를 토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성공을 거두었다.
회사를 세우는 이도, 회사를 이끄는 이도, 회사에서 일을 하는 이도, 회사의 고객이 되는 이도 인간이다. 즉 경영은 인간이다.
인문고전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 특히 경영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것은 인문고전이 길게는 수천 년 짧게는 수백 년 동안 각 시대의 리더들에게 철저하게 검증받은, 인간에 관한 최고의 지침서이기 때문이다. 각 시대의 리더들은 문학고전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을, 철학고전을 통해서 인간의 생각을, 역사고전을 통해서 인간의 삶을 배웠다. 그리고 자신의 배움을 국가, 군대, 기업 등의 경영에 활용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경영이다. 경영은 인간을 움직여서 '변화라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창조 행위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움직이려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그것도 거의 완벽하게. 쉽게 말해서 인격의 한 부분이 성인聖人의 경지에 올라서야 한다. 때문에 경영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 뛰어난 실적을 올리는 것, 회사를 업계 1위의 자리에 올리는 것은 경영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일을 잘하는 것에 불과하다. 진정한 경영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새로운 역사를 쓰는 행위다. 궁극적으로는 소크라테스처럼 공자처럼 노자처럼 시공을 초월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경영의 성패는 경영자가 일의 본질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경영자는 자신이 파악한 일의 본질에 따라 경영전략을 짜기 때문이다.
도요타 경영진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본질을 '고객'이 아닌 '이윤'으로 잘못 파악했다. 도요타의 모든 불행은 거기서 시작됐다.
삼성 신경영은 일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 대표격인 사례다. 당시 삼성 회장이었던 이건희는 삼성이 수주업 분야에서 수조 원의 기회손실을 입었는데 이는 다름 아니라 수주업이라는 일의 본질을 파약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일침을 가하면서, 세계 삼류인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려면 무엇보다 일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체중이 10킬로그램 이상 줄고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삼성이라는 기업이 하는 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건희는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에서, 그렇게 파악한 일의 본질을 토대로 일의 특성을 추출해내자 그로부터 일의 핵심 성공요인을 추려낼 수 있었고, 그 핵심 성공요인에 관리 역량을 집중하자 사업의 성공이 저절로 따라오며 세계 삼류에서 초일류로 도약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건회는 일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다음 일곱 가지 질문을 던졌다.
1. 이 일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2. 이 일의 뿌리는 무엇인가?
3. 이 일의 핵심기술은 무엇인가?
4. 이 일의 핵심기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5. 이 일의 경쟁력의 핵심은 무엇인가?
6. 이일의 고객은 누구인가?
7. 고객의 기호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손무의『손자병법』이 경영에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언어가 아닌 감각으로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경영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읽는 즉시 깨달을 것이다. 그 안에 경영의 모든 것이 들어 있음을. 물론 어떤 사람은 『손자병법』을 읽고도 아무것도 느끼는 바가 없을 수도 있다. 감히 말하고 싶다. 그 사람이 경영하는 기업은 오래지 않아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반대로 『손자병법』을 읽고서 의식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경영하는 기업은 언젠가 반드시 초일류 기업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전정한 독시는 인문고전 저자와 내화를 나누는 것이며, 문장 뒤에 숨이 있는 전재의 정신을 만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한다. 깨달음이 있는 책 읽기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한편으로 사랑이 간절함보다 훨씬 중요하다. 사랑은 곧 인문고전 독서의 목적과 관계된다. “나는 왜 인문고전을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천재가 되기 위해서, 창조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서, 업무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회사를 잘 경영하기 위해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등등. 그렇다면 왜 천재가 되어야 하고, 왜 창조적인 사고를 해야 하고, 왜 업무능력을 높여야 하고, 왜 회사를 잘 경영해야 하고,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한 유일무이한 답은 '사랑'이어야 한다.
세상을 위해서였다, 진심이다. 진실로 진심이다. 나는 언제나 미래의 무수한 독자들을 생각하면서 머리 싸매고 인문고전을 읽었다. 때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장 때문에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혈압이 엄청나게 올라가기도 했지만, 내 수준을 높여야 독자들에게 좋은 작품을 선보일 수 있고, 독자들의 힘이 되고, 그 아름다운 힘들이 모여서 세상을 보다 밝게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뜨거운 믿음이 있었다.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갈 때, 난공불락처럼 여겨지던 한 구절 한 구절이 어느 순간 기적처럼 깨달아지는 경험을 자주 했다.
그러다보니 다들 이런 식으로 하나보다 하는 고정관념을 갖게 되었고, 그 고정관념은 그들의 사고능력을 망가뜨렸다. 쉽게 말해서 그들은 인문고전을 읽으면서 도리어 바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인문고전은 치열하게 읽어야 한다. 미친듯이 지독하게 읽어야 한다. 그래야 깨달음이 온다. 그 깨달음을 여러 번 얻고 난 뒤에 역시 자신처럼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을 만나서 토론하면 그것이 최고의 토론이다. 서로 안에 잠들어 있는 천재성을 일깨우는 최상의 토론이다.
책의 내용만 말하지 말고,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을 표현하기를 권한다. 곧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정말 어려웠는데, 작심하고서 열 번을 읽었더니 뭔가 머릿속이 시원하게 맑아지는 것을 느꼈어”라든가 “이 부분을 필사했는데 그 순간 두뇌에서 어떤 깊은 떨림 같은 게 왔어"같이, 흘로 독서를 할 때 누구나 느끼게 되는 자신만의 내밀한 감정을 솔직하게 주고받으라는 의미다. 그러면 지식에서 지혜로 가는 시간이 무척 짧아질 것이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일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세종은 왜 그토록 힘들게 독서했던 걸까? 나는 그가 백성을 애타게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세종이 인문고전 연구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집현전 학사들을 모아놓고 한 다음 말에서 그 확신을 얻었다.
“내 유일한 소망은 백성들이 원망하는 일과 억울한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농사 짓는 마을에서 근심하면서 탄식하는 일이 영원히 그치는 것이요, 그로 인해 백성들이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내 지극한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우리 모두 목숨을 버릴 각오로 독서하고 공부하자. 조상을 위해, 부모를 위해, 후손을 위해 여기서 일하다가 같이 죽자.”
세중은 무엇보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랍들이 최고가 되지 못하면 백성들에게 최고의 정치를 베풀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이 최고가 되지 못하면 신하들을 제대로 이끌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알았다. 그래서 세종은 먼저 자신을, 다음으로 신하들을 그토록 뜨거운 독서의 장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 앞에서 했던 말을 실제 정치로 증명했다. 그는 오직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유교에 찌든 사대부 지식인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써가면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창조했다. 어디 그 뿐인가. 정치, 경제, 과학, 의학, 군사, 법률, 학문, 농업 등 백성들의 삶과 관련된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백성을 위해 분투했고,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왕도 따라오지 못할 찬란한 결과물들을 만들어냈다. 심지어는 여자 노비들을 위해100일에 달하는 출산휴가 제도를 만들었고, 같은 노비인 남편도 한 달 동안 아내를 돌볼 수 있도록 했다. 재위 기간 내내 고아, 노인, 병자, 죄수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기본권을 직접 챙겼음은 물론이다.
한편으로 세종은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인문고전 독서는 독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늘날 선비들은 말로만 경학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치를 궁극하게 밝히고 마음을 바르게 한 선비가 있다는 것은 여태것 들어본 적이 없다. 너회 선비들은 매일 경학을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왜 진짜 선비가 없는 것이냐!” 이런 세종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에 깊이 담으려는 처절한 노력없이 그저 세종의 백독백습만 따라 하면 그 사람이 과연 세종 같은 천재가 될 수 있을까?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인문고전 독서법의 핵심은 천재들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백독백습을 비롯한 다른 모든 독서 기법들은 다만 천재들의 마음을 깨닫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을 외우도록 노력해보게나. 그리고 그것에 대해 깊이 명상하여 친숙한 것으로 만들어보게. 그러면 어찌다 고통스러운 일이 닥치더라도 자네는 고통을 치유할 문장이 마음속에 새겨진 것처럼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걸세.
그 필사의 천재가 권유하는 최고의 필사는 영혼을 뒤흔드는 문장들을 마음속에 새기는 것이다. 그 방법은 암송 즉 외우는 것이다.
입한 열면 인문고전의 글귀들을 줄줄 읇고 손에 붓만 잡으면 일필휘지로 인문고전의 내용을 쭉쭉 써대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천재들의 혁명적인 사상과 삶을 전혀 알지 못해 삶에 아무리 발전이 없고 세상에 어떤 기여도 하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인문고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두뇌가 열리고 성장하고 변화하기는커녕 그 반대의 결과만 얻는 사람들 말이다.
서양의 천재들도 이구동성으로 인문고전 독서의 핵심은 단순히 눈으로 읽고 입으로 외우고 손으로 베껴 쓰는 게 아니라 마음과 영혼으로 읽어서 깨달음을 얻는 '사색'이라고 말한다.
“독서는 단지 지식의 재료를 얻는 것에 불과하다. 그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오직 사색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궁리窮理 및 격물格物하여 깊이 파고들어라. 그럴 때라야만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궁리 및 격물이 완벽하면 실천은 저절로 뒤따른다.”
“책을 읽으면 사색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얻는 게 있다. 그러나 만일 사색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법의 핵심인 '반복독서-필사~사색은'깨달음'을 향해 있다. 이는 곧 '깨달음'이 있는 독서를 해야 천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깨달음이 있는 독서란 책을 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요, 그의 정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인문고전의 저자와 동일한 수준의 사고능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왕수인과 이의의 고백을 접하고 내가 왜 천재적인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왕수인이나 이의처럼 사랑해본 적이 없다. 그 사랑의 크기가 너무도 미약했으니 나의 '깨달음'이란 것도 미약할 수밖에. 위대한 인문고전을 집필한 사람들은 비록 그 표현은 각기 달랐지만 마음은 똑같았다.
그들에게는 인류를 향한 천재적인 사랑이 있었다. 때문에 천재적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고, 그들의 깨달음은 곧 인류의 새로운 역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꾼다. 잔악무도한 악인을 성자로 변화시키고, 서로 적이었던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어주고, 분열된 가정을 하나 되게 한다.
그런 위대한 능력을 가진 사랑이 인간의 두뇌 하나 바꾸지 못 하겠는가. 이렇게 보면 인문고전 독서교육도 무조건적인 사랑의 마음을 지닌 사람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할 때 그 효과가 가장 클 것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마음으로 인문고전을 읽고, 필사하고, 사색하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 문장 뒤에 숨은 천재들의 인류를 향한 숭고한 '사랑'이.
그 사랑과 만나는 순간 당신의 심장은 위대한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동시에 당신의 두뇌 깊은 곳에서 황홀한 깨달음의 빛이 터져나와서 당신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라. 영혼 깊이 사랑하라.
참고로 율곡은 『성학집요』에서『논어』에 나오는“『시경』의시300편을 다 외운다 해도 정치를 맡겼을 때 통달하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보냈을 때 단독으로 대처할 수 없다면 비록 시 많이 외운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라는 구절을 인용해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독서는 무의미하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고전을 읽어서 두뇌가 변화하고 천재가 되고 위인이 되는 것도 좋겠지만 무엇보다 퇴계 이황처럼 여유릅고 자유로운 마음을 지닌 독서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비록 산에서 살고 있지만 오랜 병을 앓고 있는 터라 책을 마음껏 읽지 못하고 있다.
마음이 울적하여 호흡을 조절하다 보면 몸이 가뿐해지고 정신이 상쾌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본다. 그러면 감개感慨가 저절로 일어난다.
니는 책을 덮고 지팡이를 손에 잡고 밖으로 나간다.
난간에 기대서 연못도 구경하고, 단壇에 올라 사社를 찾기도 하고, 동산을 돌아보며 약초를 심기도 한다.
혹은 돌 위에 앉아서 샘물을 희롱하기도 하고, 대臺에 올라서 구름을 바라보기도 하고, 여울에서 고기를 구경하기도 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벗하기도 한다.
그렇게 발길 가는 대로 시름없이 노닐다가 또 좋은 경치를 만나면 흥에 취해 마음껏 즐긴다.
집에 돌아오면 고요한 방에 책이 가득 쌓여 있다. 나는 책상을 당겨서 잠자코 앉아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이理를 사색한다.
때로 마음에 얻는 바가 있으면 흐뭇한 나머지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다.
흑여 얻지 못하면 친구에게 물어보고 그래도 알지 못하면 더욱 분발하여 사색한다.
하지만 억지로 통하려 하지 않고 마음 한쪽에 밀어두었다가 가끔 끄집어내서 허심탄회하게 사색하고 저절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린다.
오늘도 이러하고 내일도 이러하다.
'책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크호스 (1) | 2023.03.30 |
---|---|
집중력 (0) | 2023.03.30 |
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 (11) | 2023.03.30 |
광고천재 (0) | 2023.03.30 |
1천권독서법-전안나 (0) | 2023.03.30 |